퇴직금 기금화, 왜 반대해야 하는가
갑자기 속도 내는 퇴직연금 기금화,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여당이 퇴직연금 기금화를 1월 중 발표하겠다며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 430조 원이 넘는 퇴직연금 적립금을 국민연금처럼 하나로 모아 운용하겠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수익률 제고”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과연 이 정책이 정말 근로자를 위한 것일까?
1. 내 돈인데, 왜 국가가 가져가나
퇴직금은 내가 수십 년간 일해서 번 개인의 재산이다. 그런데 기금화는 이 돈의 운용 선택권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국가나 공단에 넘기겠다는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정치권의 발언이다. 지난해 한 여당 의원은 퇴직연금 기금화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공공 영역에서 운영할 때 사회적 가치가 극대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일해서 번 돈을 “사회적 가치”에 쓰겠다니, 이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퇴직금은 노후를 위한 사적 재산이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적 자금이 아니다. 기금화는 사실상 개인 재산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2. 국민연금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국민연금을 떠올려 보자. 2071년 고갈이 예정되어 있고, 젊은 세대일수록 “내가 낸 만큼 받을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크다. 최근에는 국민연금이 환율 방어나 증시 부양에 동원되고 있다는 의구심까지 제기되고 있다.
퇴직연금 기금화는 사실상 “제2의 국민연금”을 만드는 것이다. 정부 주도로 퇴직연금공단을 설립하거나 국민연금공단이 운용에 참여하게 되면, 퇴직금 역시 정책적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도 지적한다. “국민연금이 고갈되는 등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또 다른 공적 기금을 만드는 방식은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또 다른 기금을 만들어 무슨 소용이 있을까?
3. 필요할 때 쓸 수 없는 돈
퇴직금의 본래 목적은 무엇일까? 퇴직 시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한 목돈이다.
현실을 보자. 40~50대에 명예퇴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때 퇴직금은 새로운 사업 자금, 주택 구입 비용, 자녀 학비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그런데 기금화에 연금화까지 강제되면 어떻게 될까?
정작 돈이 필요한 시점에 내 돈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40대에 퇴직하고 퇴직금은 기금에 묶여 있다면, 당장의 생계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퇴직금의 본래 취지 자체가 무색해지는 것이다.
4. “수익률 제고”라는데, 국민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은 “수익률 제고”다. 현재 퇴직연금 수익률이 2%대로 국민연금(8%대)에 비해 현저히 낮으니, 기금화를 통해 전문가가 운용하면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런데 정말 국민들이 퇴직금의 높은 수익률을 원할까? 투자의 기본 원칙을 생각해보자. 수익률이 높으면 리스크도 높아진다. 고수익에는 반드시 고위험이 따른다.
퇴직금은 노후의 마지막 보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직금을 고위험 고수익 투자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수익률이 낮더라도 안전하게 지켜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실제로 설문조사에서도 기금형 제도 운용 시 가장 중요한 사항을 묻자 ‘운용 투명성(43.6%)’이 ‘수익률(34.9%)’보다 앞섰다. 국민들은 수익률보다 안정성과 투명성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설령 높은 수익률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현재 DC형 퇴직연금에서도 TDF, ETF, 펀드 등 다양한 투자 상품을 통해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수익률을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선택해서 투자하면 된다. 굳이 국가가 나서서 모든 사람의 퇴직금을 강제로 고위험 자산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
결국 “수익률 제고”라는 명분은 국민의 니즈와 동떨어진 것이다. 400조 원이 넘는 퇴직연금 자금을 국내 증시 부양이나 국민성장펀드 재원으로 활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는 이유다.
5. 졸속 추진, 충분한 논의는 어디로 갔나
노사정 TF(태스크포스) 논의가 이제 막 시작됐다. 쟁점에 대한 입장 확인 단계에 불과하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은 “1월 중 발표”를 목표로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
찬반 의견이 팽팽히 갈리는 사안이다. 설문조사에서도 기금화에 대한 우려사항으로 “기금 운용 실패 위험성(25%)”, “운용기관 신뢰 부족(16.6%)”, “정치적 개입 가능성(15.9%)”, “개인 선택권 축소(15%)” 등이 제기됐다.
더 큰 문제는, 기금화 말고도 수익률을 개선할 방법이 이미 존재한다는 점이다. 2022년 도입된 디폴트옵션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할 수 있게 해놓는 바람에 효과가 미미했는데, 이를 실적배당형 중심으로 개편하면 수익률 개선이 가능하다. 또한 현재 퇴직연금은 일임이 막혀 있는 구조인데, 이 규제를 완화해서 가입자가 전문가에게 운용을 맡길 수 있게 하면 굳이 기금화 없이도 전문적인 자산운용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기존 제도를 개선할 여지가 충분한데, 왜 졸속으로 기금화를 밀어붙이는가? 충분한 검토 없이 성급하게 도입한 제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우리는 디폴트옵션에서 이미 경험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결론: 선택권을 보장하라
나는 퇴직연금 제도 개선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강제적인 기금화는 반대한다.
만약 기금화를 도입한다면, 선택형이어야 한다. 기금형을 원하는 사람은 기금형으로, 현행 유지를 원하는 사람은 그대로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노후 자금의 운용 방식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정부가 정말 근로자의 노후를 걱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대안에 집중해야 한다:
- 금융기관 수수료 규제 강화
- 일임 서비스 활성화로 전문가 자문 접근성 확대
- 디폴트옵션 제도 실질적 개선
- 투자 교육 및 정보 제공 확대
400조 원이 넘는 국민의 노후 자금이다. 속도전이 아니라,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 내 퇴직금은 내가 결정할 권리가 있다.
